성욕과 식욕은 밀접한 관계로 우리의 일상사에 영향을 끼쳤고 그것은 예술 작품 속에서도 가끔 연관된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이와 관계되는 여러 가지 연구와 실험도 행해지고 있다.
우리는 과일로 묘사된 그림 속의 성기나 기이한 음식 속에서 나신(裸身)이 찍힌 사진을 본 적 있다. 요사이 젊은 층이 즐겨듣는 노래 가사 속에는 ‘파티’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가만 새겨보면 그것이 섹스행위를 가리키는 말인 줄 은연중에 느낄 수 있다.
최근 개봉된 ‘샤만카’라는 영화에서는 집착된 성행위의 종말점으로 섹스파트너를 식음의 재료로 만들어 그 행위로 하여금 음식과 섹스를 동일시하는 기법을 썼다. 이 영화에서 ‘이오나페트리오’는 돌아서 가는 남자를 살해하여 그 피를 끼얹고 골을 꺼내 먹음으로서 비로써 육신의 일체감과 정신적 승화로 섹스를 완성한다는 줄거리로 그 잔혹성의 극대화를 그렸다.
이 또한 섹스의 행위와 먹는 행동을 동일시하는 발상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겠으나 이 뜻 없는 - 사실은 의미 있는 - 생각들이 저토록 무시무시한 장면을 만드는 밑바탕에도 도사리고 있었다는 것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또 한번 살펴보면 오래 전 영화 ‘거센 입김’에서는 스스로를 먹어 없애려하는 네 사람이 나온다. 그들은 관능주의와 입을 동시에 만족하는 방법으로 자살을 택한다. 입을 만족시키는 행위 하면 얼른 남녀간의 오랄 섹스를 떠올릴 것이다. 이것 또한 유년기의 기억이 섹스로 승화된 욕구의 일종이다. 즉 어머니의 젖을 빨던 입술과 혀의 본능은 성인이 되어 상대의 성기와 접촉으로 음식과 섹스를 같은 연장선상에 놓은 것이다.
음식은 섹스를 변화시킬 수도 있다. 육류나 술·설탕을 많이 섭취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폭력적인 섹스와 자기만족 위주의 섹스로 바뀐다. 야채나 우유·초콜릿 등은 섹스를 온순하게 바꾸고 타인을 배려하려는 마음가짐이 생긴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반면 섹스를 위하여 음식을 바꾸는 사람도 있다. 나이가 들어가며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면 남성은 섹스에 좋은 음식을 찾는다는 것이다. 평소 거들떠 보지도 않던 음식. 예를 들어 보신탕이나 뱀탕’, 용봉탕 등이 그것인데 이를 분석한 결과, 다른 음식과 비교되는 것이라고는 고 열량 또는 고 단백 식품이라는 것 외에는 별 차이가 없고, 실험하여 정력이 개선되었다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면 왜 우리는 보신음식과 정력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걸까? 그 이유는 이러한 것에 있다. 배고파도 먹을게 없어 영양이 부족했던 시절, 그때의 어른들은 당연히 섹스 할 힘마저도 모자랐을 것이다. 허기져 견디다 못해 어쩌다 개나 한 마리 잡아 이웃끼리 나누어 먹든지 산에서 뱀이라도 잡아 푹 고아 먹으면 그날 밤은 없던 힘이 솟아 날 것은 당연한 일. 그래서 개(?)탕과 뱀탕들이 정력음식으로 자리잡게 된 연유이다. 재미있지만 어떻게 보면 슬프기도 한 우리의 옛 음식문화의 소산인 셈이다.
먹고 먹히는 음식과 먹고 먹히는 섹스. 구조적 결합형상으로 보면 이는 분명히 여자가 먹고 남자가 먹히는 모습이나, 능동적 운동형상으로 보면 남자가 먹고 있는 그림인데, 아무도 누가 먹고 먹히나 알 수 없는 것. 바나나를 껍질 벗겨 열심히 먹고 있는 입의 모습과 깊은 산골 졸졸 흐르는 옹달샘 앞을 기웃거리다 퍼먹고 또 퍼먹고 끝내는 다 퍼내 버리는 모습의 대조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퍼내도 또 퍼내도 옹달샘은 또 있고 먹고 또 먹어도 과일은 거기 있어 영원한 남녀의 즐거운 음식-섹스는 이긴 자와 지는 자를 모른 채 지금도 투쟁하고 있다.